오늘은 미국의 가장 길고, 깊었던 경제 위기 기간인 1929년부터 1939년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대폭락의 시작, 인간의 탐욕으로 인한 혼돈
경제 대공황은 10여년 동안 지속되었네요 그 시작은 1929년 월스트리트 대 폭락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20년대는 부가 넘쳐나고 있었네요. 미국 공업의 대 팽창이 이뤄졌습니다.
공업의 대 팽창과 미국 농촌의 대 위기는 공업과 농업의 극심한 차이를 가져왔고
농촌의 극심한 재정적인 위기를 초래했습니다.
지속적인 주식 활황으로 사람들의 심리에 주식 상승은 지속될 것이라는 착각에 빠지게 하였죠.
1929년 3월 연준이 과도한 투 기세를 지적하자 투자자들은 빠르게 주식을 매도하기 시작했네요.
이게 점점 덩어리가 커져 급격한 매도세를 유발했네요.
은행에서 신용 대출 제공하겠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금융 위기를 일시적으로 막는 효과를 나타냈지요.
하지만 이는 아주 일시적인 현상일뿐 대세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미국 경제는 불안한 모습을 나타냈네요.
위에 산업 평균 지수의 하락에서 보면 알수 있습니다. 건설업, 자동차 판매량 감소, 강철의 소비 감소
등의 부진이 나타났네요. 이러한 경제 불황의 신호에도 불구하고 다시 주식시장은 상승세를
기록했네요 다우지수는 1929년 6월 부터 9월까지 약 20% 상승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네요.
지금과 비슷한것 같습니다. 불황이라고 폭락이 이어지지 않죠.
9월 5일 금융 전문가의 대폭락 발표와 그다음 날 주식시장의 3% 폭락하면서 금융 전문가의
이름을 따서 뱁슨의 대폭락이라고 불렀네요. 사람들은 지금과 같이 주식을 저렴한 가격에
살 수 있는 기회라 여기며 다들 매입에 열을 올렸네요. 이때가 마지막 손절의 기회였네요
9월 20일 런던 중건 거래소의 영국 최대 투자자였던 크랄 랜스 패트리가 사기와 위조 혐의로
구속되었으며 이러한 소식이 퍼지자 영국 증시는 대폭락 했네요.
대폭락이 이어지는 날에도 시장은 심하게 흔들려 매수 매도가 반복되었네요
지금과 판박이네요. 인간의 탐욕이란
10월부터는 매도세가 강하게 나타나게 되네요. 검은 목요일이라고 부르는 10월 24일에는
개장하자마자 11% 폭락으로 시작하여 시장의 공포감이 커졌네요.
월가는 1시에 주요 경제인들 간에 회동을 가졌으며 시장의 공포감을 잠재우기 위해
움직였네요. 이때의 결론은 우량주에 대해서 시장가보다 높은 가격에 구매하는 것을 추진했네요.
이러한 상황은 임시로 폭락 사태를 일부 막을수는 있었네요.
이러한 검은 목요일 사건은 투자자들이 주식을 매도하는 동기를 부여하게 되었네요.
두려움이었겠지요. 투자자들의 이러한 매도세는 다우지수의 하락을 유발하였고 하루에만
13%의 폭락을 만들어 냈네요.
그다음 날에는 약 12% 더하락 하게 되었네요. 금융계 큰손들이 대중에게 보여주기 식으로 대량의
주식 매입을 했으나 이러한 노력에도 주식폭락을 막지는 못했네요.
시장은 이틀동안 약 300억 달러가 증발했네요.
10월 30일 에는 12% 상승 다음날 다시 하락 전환 11월 14일부터는 다시 회복
보합이 이뤄지는 혼돈의 장이 시작되었네요.
1931년 4월 부터 1932년 7월까지 수% 씩 지수 하락이 진행되었네요.
1929년 최고점 대비 89%의 하락이 이뤄졌네요.
1933년 3월이 되서야 다우존스는 폭락했던 지수를 천천히 회복하기 시작했네요.
1930년대 초중반에는 다우존스 지수가 높은 수준으로 회복하였네요.
다우존스의 최고점은 1954년이 돼서야 회복할 수 있었네요.
1929년 월가의 대 폭락은 대 호황 직후 일어났습니다.
건설, 소매, 자동차 판매, 철강 생산, 운송량등의 모든 분야에서 기록을 경신하여
최대를 돌파했네요. 이러한 활황은 수십만명의 사람이 주식시장에 투자하는 주식의
호황세로 이어졌네요. 이들 대부분이 더 많은 주식을 사기 위해서 신용 매매를
진행하였네요. 당시 85억달러가 신용 대출이 진행되었는데
이는 미국내 유통된 전체 통화량보다 많은 수준이었네요.
주식 상승이 이어지면서 투자자들은 주식이 더오를것이라 기대하고 더욱더
내몰리게 되었네요. 이러한 생각가 추청이 더욱더 심해 지면서 거품 경제를 만들어
냈네요. 당시의 주가 수익율 역시 어느 때 보다 많아지게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심각한 주식 투기세가 부작용을 만들어낸 것으로 보입니다. 20년의 활황의
부작용이었지요.
대공황으로 인한 결과
1920년대 대공황은 1929년 여름부터 시작되었으며 당시 100년간의 경제 성장을
전부 지워버렸고 산업생산은 강한 타격을 받아 50% 떨어졌네요.
1933년에는 실업률이 25% 대로 절정에 도달했고 사람들의 평균 근무시간이
줄어드는 현상이 발생했네요 주당 근무시간이 평균 49시간에서 41.7시간으로 떨어지게 되었네요.
개인적으로는 실업률 상승으로 인해 개인들은 재정적으로 심한 고통을 받았으며
심지어 몇년동안 무직 상태로 다수의 근로자가 있어야 했네요.
실패 의식이 뿌리깊게 박혔고 가정 폭력 문제가 불거 졌으며 정신과 상담이
늘어가는 계기가 되었네요.
정신적 그리고 경제적 문제로 인해 결혼을 하거나 자식을 갖는 것을 연기하고 포기하는
사례가 다수 발생하였네요. 또한 잘 먹지 못하여 영양 부족 사태를 겪는 경우도 다수
발생하였네요.
당시 여성의 취업률은 낮았고 대부분의 경제 활동은 남성에게 지워졌네요.
그러다 보니 여성의 실업률 자체는 높게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또한 인종차별로 흑인의 취업률이 백인보다 낮게 나타났네요.
이러한 미국의 경제 공황은 세계 여러 국가에도 펴져나갔네요. 캐나다와 유럽 등의
국가들이 비슷한 수준의 경제적인 고난을 겪었네요. 실업자들이 넘쳐나게 되고
산업 전반의 생산성과 소비가 떨어지게 되는 현상을 겪을 수밖에 없었네요.
남미의 경우 높은 관세를 통해 자급 자족 경제를 유지하려 노력하였고
개발 도상국 국가들 역시 높은 관세를 통해 경제 불황을 극복하려 노력하였네요
대공황의 탈출 뉴딜 정책
뉴딜정책은 실업자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주고 경제 구조 개혁을 통해
대공황 탈출하기 위해서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이 1933년 1936년 추진한
정책입니다.
193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 되고 나서 처음 진행한 정책은
은행의 구조 조정이였습니다. 긴급 은행법에 따라서 연방의 자금 지원과 재무부 감독 아래
건전성이 있는 은행만 영업을 재개하고 나머지 은행은 파산 절차에 돌입하였네요. 지역은행
4004개가 파산당하거나 대형은행에 합병되었네요.
이들 은행 예금자들은 예금액 85%를 돌려받을 수 있었네요.
두 번째 한일은 금본위제의 중단이었네요. 금본위제에서는 화폐가치 방어를 위해
이자율을 높일 수 있을 뿐 이자율을 낮추는 방법이 없었네요.
금본위제의 폐지로 금화 소유자는 금화를 미국 달러로 교환도록 강제하였네요.
외환시장에서 달러는 금의 지급을 보장하지 않았네요. 금에 대한 화폐가치를
자유롭게 시장 가격에 따르게 하였네요.
시장은 1933년 바닥을 치고 나서 회복하기 시작했네요
공무원의 월급을 줄이고 퇴역군인의 연금을 40% 삭감하는 조치를 단행했습니다.
예산에서 수입과 지출의 균형을 맞추고자 했네요.
루스벨트는 농업 문제에도 관심을 가졌네요. 농산물의 생산량 조정을 통해서
농산물 가격을 상승시켜 농가 소득을 증가시켰네요.
농업 조정국에서는 옥수수, 솜, 유제품, 돼지고기, 쌀 담배, 밀의 미국 생산량을 통제했습니다.
또한 생산량 통제를 위해서 땅을 놀리는 지주에게는 별도 보조금을 지급했네요.
이러한 공급 축소 정책은 목화와 밀 생산량의 25%를 줄였네요.
이러한 뉴딜정책으로 농가 소득이 급속히 증가하게 되었네요.
금주법의 폐지했네요. 술의 제조와 판매를 합법화했고 이러한 금주법의 폐지는
주정부와 도시의 새로운 수입원이 되었고 금주법의 반대하던 도시의 시민들의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있었네요.
다음 시간에는 두 번째 뉴딜 정책에 대해서 설명드릴게요
[제1화] 1920년 경제 대공황의 역사에서 교훈을 얻자, 치욕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배워야 한다.
[부동산 스터디]그래도 아직은 희망을 갖고 싶다. 우리 주변의 희망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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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억 투자 포트폴리오]10억이상 부동산 부자들은 어떻게 돈굴리고 자산을 축적해서 생활하는지 한번 배워보자